이집트와 요르단의 군사 집결 등 아랍국들의 전쟁준비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1967년6월5일 선제공격으로 대응한다. 공습 몇 시간 만에 이집트 공군력은 거의 전멸 되었다. 요르단군이 예루살렘 유태인지구를 공격할 때 이스라엘은 성소가 밀집해 있는 동예루살렘을 비롯해 요단강 서안 전역을 점령해 버렸다. 북부에서는 골란고원을 시리아로부터 빼앗았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다. 이스라엘은 즉각 동예루살렘, 서안지역, 골란고원, 그리고 가자지구를 자국 영토에 복속 시켰다. 전쟁을 주도했던 애꾸눈 다얀장군은 유태인세계의 영웅으로 등장했다.
1973년10월6일은 유태인들의 년중 가장 엄숙한 대 속죄일인 욤카푸르였다. 이날 하루는 금식하면서 일 년간의 잘못을 참회 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날이다. 아랍군 들은 이 같은 욤카푸르 날 오후2시에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동시공격 했다. 이스라엘은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소련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엄청난 물량의 무기를 긴급 공수 하였고 미국도 이스라엘에 대량으로 무기를 긴급공수 했다. 전쟁 16일 만에 이집트는 손을 들고 UN과 소련에 휴전을 요청 했다.
양국 사이에 남은 것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인명피해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이 재건되자 해외 유태인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아랍국들과 싸워야 하고 내부적으로는 밀려오는 이민을 흡수해야 하는 이스라엘 정부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는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해외유태인들의 귀환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해외유태인의 귀환은 대부분의 경우 미국유태인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한 로비와 자금지원이 선행되어 왔다. 구공산권 소련을 대상으로 벌인 집요한 로비는 1988년 고르바초프가 자국의 유태인에게 이스라엘 또는 서방국 으로의 이민을 허용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 오늘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국토면적은 우리나라의 약1/5남짓하며 인구는 600만 명을 넘어섰다.GNP는 16500달러이며 일년 수출은 200억 달러, 수입은280억 달러. 최대수출산업은 다이아몬드 가공이다. 최근에는 하이테크의 총아로 급부상하고 있다. 군사력에서는 과거 4차례 아랍전쟁에서 그 실력을 과시한 바 있다.또 이스라엘 국익에 반대되는 정책을 고집한 미국의 정치인중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이다.
이스라엘의 안보와 평화가 보장 될 경우 1967년 6일 전쟁에서 획득한 땅을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할 정도로 평화를 갈망 한다.
종교율법 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더 중하게 여기는 일반인들은 초 정통파 유태인들의 행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유태인은 초 종교파와 자유파간의 대립이 자칫 민족을 양분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걱정하고 있다.1999년 이스라엘 총리 선거에서 일반인들의 다수표를 의식한 야당당수는 초정통파유태인들의 병역의무를 강조하고 나섰다. 그는 총리에 당선되었지만 초 정통파의 종교정당이 더 많은 의석수를 확보하여 제1야당과 비슷한 규모가 되었다. 총리의 집권당은 초 정통파 종교정당을 연립내각에 포함 시켰다. 향후 이스라엘 유태인내부의 갈등이 어떻게 풀려갈 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