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고향에서의 면민회 활동(63)
[그때 그시절] 고향에서의 면민회 활동(63)
  • 김희경
  • 승인 2010.03.30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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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인사가 엮는 회고록 … 아버지의 뜻을 이어 둘째 형님과 고향 발전에 이바지

[덴탈투데이/치학신문] 아버지는 애향심이 깊은 분이셨다. 고향 성천군민을 위한 성천군민회 10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나는 서울로 이사와 고향 성천면민회에 참석하여 낙후된 면민회 재건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면민회에는 고향 초등학교 동기생도 생존해 있었다. 그들과 회합하여 면민회 재건에 대한 상의를 하였다. 회명은 내 제안에 따라 성민회로 정하고 회장은 동기생 중에서 선출했고 일선에서 활약할 역원은 우리보다 젊은 층에서 선택했다.

얼마후 성천군민회에서 부회장직을 위임 받았으나 나는 군민회 보다는 면민회 재건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해 성민회 고문으로 만족했다. 성민회 역원들은 성철농업전문학교 출신들이라 업무처리에 능숙하여 점점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큰형님은 고향에 계실때 자기가 전공한 농과계통에 종사하셨다. 일본 삿뽀로농과대학을 졸업하신 숙부님과 자주만나 농업에 대한 의견을 자주 교환 하신 것으로 안다 농과계통을 졸업하고 즉시 ‘성척농장’이란 간판을 걸고 주로 밤 낙엽송 옷나무 등을 재배했다.

밤나무나 낙엽송은 1년생 2년생 등으로 구분하여 국내 만주 증지로 수출하였다. 또한 돼지 호주산염소도 키웠다. 돼지는 20여마리 염소는 50마리 정도였다. 봄철이 되면 염소의 털을 깎아서 공장으로 보내면 멋진 옷이 나온다. 그러한 사업을 하시다 38선을 넘어 서울로 정착한 후로는 직업을 180도 바꿔 상업을 택했다.

형님께서는 동생 두명에게 말하셨다. 너희 들은 의사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평생 그 기술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나는 기술이 없으니 돈버는 것이 내의 평생 직업이라고 말씀 하셨다. 동생인 우리 입장에서는 형님의 그 말씀이 백번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됐다.

그러한 상혼정신이 철저하여 돈 버는 데는 최선을 다 하셨지만 돈을 쓰시는 데는 인색하셨으니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것은 둘째형님과 나의 몫이라 생각하여 둘째형님은 성천군민회를 나는 면민회를 각자 분담봉사 하기로 하였으며 둘째형님은 군민회 고문으로 봉사하고 있다.

고향 동기생도 10명 정도가 남쪽으로 왔으나 세월이 지나 지금은 3명만이 성민회에 참석한다. 2개월마다 모이고 남녀 합치면 40여명이 참석한다. 모이면 언제나 고향 이야기다. 최근에 와서는 또 고민이 생겼다 성민회가 발족한지는 34년간에 세월이 지났다.

그 당시는 역원들이 교대로 운영을 하였으나 성천농업전문교 졸업생들 연령이 지금은 칠순이 넘어 차기 성민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 회를 운용한 세대는 성천에서 태여난 세대이지만 앞으로 성민회를 이끌어나갈 세대는 ‘성천’이란 두 글자만 알고 고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젊은 세대에 무작정 애향심을 강조 한다는 것은 너무나 막연한 설교라 생각되어 앞으로가 걱정이다.

▲ 성천공립보통학교 졸업한 월남 동기생들. 윗줄 우측3번째가 필자

◆ 일본 ’시고쿠‘ 방문

2002년도는 일본측 주체로 시고쿠 지방여정이 확정 되었다. 10월1일 3박4일 예정으로 인천공항을 출발 일본 칸사이 공항에 도착해 관광버스로 고베 아기이시 해협대교 아와지시마 야지마단층 등을 보면서 로얄호텔로 향했다.

이곳 시고쿠에 거주하고있는 ‘이마이 야스오’군 과 만났다 이마이군은 나보다 조금 늦게 나남19사단에 입대하여 휴전과 동시에 시베리아로 연행되어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 친구여서 나는 그를 이마이 전우라고 부른다.

이 친구와 합류하여 다음날은 나르도대교을 건너 도구시마 나르도공원 교전지로 유명한 야시마 을 관광하고 고치시로 돌아왔다. 3일날 관광은 고치시와 마쯔야마시내 마쯔야마성 이와데절 을 보고 유명한 도고온천에서 그간의 피로를 말끔히 씻었다.

온천은 참 피로회복에 좋다. 마지막날 석별에 정을 나우면서 마쯔야마 국제공항에서 귀국했다. 시고쿠 관광코스는 그리 많은 관광객이 가지는 않는곳으로 한국측에서는 경우회 회원이 아니라도 후배 치과의사 부부가 참석하여 일행이 약20명 일본측이 1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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